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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연나연

연나연은 판단을 보류하게끔 작동하는 작업에 관심 있다. ​<폐관섬>(2020) 또한 노숙자의 보편적 이미지에서 비롯한 감상을 보류하고, 샛길로 샐 수 있는 구멍을 뚫고자 한다. 따라서 장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거나 도태되는 소수자에 대해 다루기보다 ‘자발적 고립’이라는 지점에 주목한다.
작가소개
연나연

연나연은 판단을 보류하게끔 작동하는 작업에 관심 있다. ​<폐관섬>(2020) 또한 노숙자의 보편적 이미지에서 비롯한 감상을 보류하고, 샛길로 샐 수 있는 구멍을 뚫고자 한다. 따라서 장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거나 도태되는 소수자에 대해 다루기보다 ‘자발적 고립’이라는 지점에 주목한다.
큐레토리얼 에세이
- 영(null)의 부품을 찾아 -

걸음을 옮기고, 몸을 움직이고, 고개를 기울이고, 시선을 돌린다. 이러한 종류의 물리적 교감을 잃은 이 시대에서 웹은 과연 적합한 전시 환경이 될 수 있는가. 각각의 방법론을 자랑하던 작품들이 웹으로 옮겨오면서 소실되는 것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바깥 공간과의 호흡이 중요한 퍼포먼스나 설치 작업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 소실이 과연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강요된 거리두기 상황 아래 새로운 실험의 시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실험은 우리가 그간 매체와 매체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일정의 소실이라 여긴 것이 사실 정당한 ‘생략’ 혹은 ‘생성’이 아니었을지 고민하게 한다. 생략과 생성 과정에서 평면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은 웹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매체 변환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방법론을 취하며, 이는 단순 아카이브와 어떤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시작되었다.
주변과 개인의 존재 방식에 대해 의문하는 연나연과 주예린은, 각각 ‘자발적 고립’과 ‘주변인에 대한 관음증적 관심’을 드러냈다. 폭넓게 해석하자면, 이들의 주제 의식은 웹 환경이 시사한 매체 변환 과정과도 맞닿는다. 작품의 변환 과정과 관람객의 감상 과정에서 일정 요소는 스스로 고립되기도 하며, 스크린 안에서의 인터렉션에 의해 관음증적으로 파헤쳐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실험의 성패와는 별개로, 그 결과가 가져다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매체의 완전성에 대한 끝없는 고려를 지속함과 동시에 변환 과정에서 정당히 폐기되거나 새롭게 생성되는 ‘부품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영(null)의 범위에 걸쳐있던 이 부품들을 고장 내어 분해하고 조립하여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큐레이터 이민지
작품 에세이
고립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조용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남겨진 먹먹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렇다면 자발적 고립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고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단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상황일 것이다. ​< ​폐관섬 >에서 고립될 수 없는 상황은 작가가 약 20년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시끄럽고 혼란한 홍대 거리로 그려진다.
이러한 고립되기 어려운 상황에서마저 고립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노숙자이다. 그들은 슬프고도 신비롭게도 소외된다.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거리에 당연히 존재하는 어떤 물체 정도쯤 여겨지는 것이다. 연나연은 그들로부터 작업 형태의 모티프를 얻었다. 선택할 수 없던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고립을 실천하기 위해, 등에는 거대한 감각차단장치를 지고 강제적으로 주입했던 감각들을 잃기로 결정했다. 차단, 고정, 환기를 수행하는 ‘장치’라는 명칭에 비해 딱딱하지 않고 연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물체들은 진화한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작가의 몸에 밀착해 ‘폐관’을 실천하는, 독립된 ‘섬’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폐관섬의 모습은 온전히 고립되고 싶다기에는 오히려 눈길을 끄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눈 밖에 나기를 바라면서도 시선을 독차지한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자발적 고립이라는 상태는 결국 불가능하며, 그렇게 이름 붙은 수행은 실은 타인의 구제를 갈구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게 한다.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 자발적 고립을 택할 지경까지 이른 개인을 발견해달라는 외침일지도 모르기에.
묘하게도 이 섬은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무런 것도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맡지 못하며, 감각할 수 없는, 곧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특히 작가가 감각차단장치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다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은 마치 독무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때 관람객의 눈에 비치는 것은 인물이라기보다는 거리 위의 조형물, 즉 생명력이 없는 무생물이다.
시각적 공해, 악취, 소음에 의해 일시적으로 훼손되는 감각은, 선택할 수 없는 강압적 상황에서 상처 입는 순간을 대변한다. 그러한 순간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으로 작가는 자발적 고립, 곧 죽음을 제시한다. 이미 조성된 환경에서 강요된 적응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은 차례차례 자신의 감각을 차단하고 결국 완전한 고립인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무기력한 듯 보이는 이 결말은 말한다. 실은 나름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큐레이터 이민지